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[[1740년대]] [[중부 유럽]] 일대를 중심으로, [[합스부르크 제국|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]](이후 줄여서 '오스트리아'라고도 표기함)의 차기 계승권을 두고[* [[합스부르크 가문|합스부르크 왕가]]의 전성기를 열었던 [[카를 5세]]는 [[1555년]] 퇴위하면서 아들 [[펠리페 2세]]에게는 [[스페인 제국]]과 [[나폴리 왕국]], [[시칠리아 왕국]], [[밀라노 공국]] 등의 이탈리아 영토와 자신의 고향이었던 [[스페인령 네덜란드|부르고뉴 저지대]]를 물려주었고 이미 [[독일왕]]이자 [[합스부르크 가문]]의 본령인 [[오스트리아 대공국]], 결혼으로 상속받은 [[보헤미아 왕국]], [[헝가리 왕국|헝가리]]-[[크로아티아 왕국]]을 통치하던 동생 [[페르디난트 1세]]를 차기 [[신성 로마 제국 황제]]로 지명했다.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왕가는 페르디난트 1세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중동부 유럽의 [[합스부르크 제국|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]]와 스페인을 포함한 나머지 지역을 물려받은 카를 5세의 후손들이 다스린 [[압스부르고 왕조|스페인 합스브루크 왕가]]로 갈라졌다.] 오스트리아, [[프랑스 왕국]], [[그레이트브리튼 왕국|영국]], [[프로이센 왕국]], [[네덜란드 공화국]], [[스페인 제국|스페인 왕국]], [[사르데냐 왕국]], [[스웨덴 왕국]], [[러시아 제국]] 등의 유럽 주요 국가들이 참전한 대규모 [[전쟁]]. 전쟁은 [[마리아 테레지아]]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대한 영토를 모두 물려받는 것에 대해 [[바이에른 선제후국|바이에른 선제후국]]의 [[카를 7세|카를 알브레히트]]가 반발하여 자신의 상속권을 주장하였으며, 이를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지원하면서 발발하였다. 전쟁 기간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-영국-[[하노버 왕국|하노버 선제후국]]-[[네덜란드 공화국|네덜란드]]-[[작센 선제후국|작센]](1743년 이후)-[[사르데냐 왕국]](1742년 이후)-[[러시아 제국|러시아]] 연합, 바이에른-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-[[프로이센 왕국|프로이센]]-스페인-작센(1742년까지)-사르데냐 왕국(1742년까지)-[[제노바 공화국]]-[[모데나 공국]]-스웨덴 연합으로 나뉘어 싸웠다. 전쟁의 결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제국 계승이 인정되었고, 프로이센이 [[유럽]]의 [[강대국]]으로 급성장하게 되었으며, 이후 [[20세기]] 초반까지 이어지게 되는 유럽 주요 국가들의 구도가 형성되었다. 또한 [[세계]]로 [[식민지]]를 뻗아나가던 [[그레이트브리튼 왕국|영국]]과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까지 참전하면서, 이 전쟁의 연속선상에서 [[남아시아]], [[아메리카]] 등지에서도 [[전쟁]]이 벌어졌다. 사실상 세계적 규모의 전쟁으로서 첫 번째 사례이자 유럽판 [[예송논쟁]].[* 유럽판 예송논쟁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아래에 언급된 [[살리카법]]과 [[1713년 국사조칙|국사조칙]] 때문에 그렇다.] 사실 이 전쟁은 [[신성 로마 제국]]의 차기 [[신성 로마 제국/역대 황제|황제]] 문제도 걸려 있는 [[전쟁]]이었다. 하지만 후술된 것처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결정하는 문제는 이차적인 것이라서, 그냥 '''왕위 계승 전쟁'''으로 불린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